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 (문단 편집) === 주종(主從) 논쟁 === 일본 육군은 창설과 발전 과정에서 [[프랑스군]]이나 [[독일군]] 같은 대륙 국가 군대들을 많이 참고했는데, 전통적으로 이런 대륙 국가 군대에서 군의 주축은 육군이고, 해군은 우선순위가 낮았다. 지상전을 주로 치러야 하기 때문.[* 물론 프랑스나 독일은 당시 세계 최강의 해군으로 평가되었던 영국 해군의 존재 때문에 해군 양성도 마냥 등한시할 수는 없었다. 특히 독일은 영국 해군에 대적하기 위해 해군 양성에 열을 올렸고, 이는 [[영국]]이 이미 동맹이던 [[프랑스]] - [[러시아]]와 삼국협상을 이루게 되는 요인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일본]]은 지리적으로 [[섬나라]]'''고, 섬나라 대부분은 육군보다는 해군력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다는 군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육지와 국경을 마주하지 않고 해상경계를 통해서 국경을 마주하는 섬나라의 특성상 해군의 중요성이 더 컸고, 자연스럽게 근대화 과정에서 독자적인 발언권을 가질 수 있었다. 특히 육군이 [[203고지]] 등의 삽질을 거듭하고 있던 [[러일전쟁]]에서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군]]을 패배시키고 [[러시아 제국]]을 [[포츠머스 조약|협상 테이블]]에 끌어낸 것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영국군]] 또한 섬나라인 관계로 [[리즈 시절]]에는 2위와 3위를 합쳐도 못 따라오는 세계 1위 규모의 해군을 운영하였고, 육군은 소수정예 위주로 운영되었다. 그런 특성상 영국은 대륙과 달리 [[대항해시대]]부터 해군이 해외의 육지를 향해 [[해병대|육군을 포탄처럼 발사하는 개념]]으로 양군을 통합 운용해 왔기 때문에 긴밀한 협조가 전통으로 굳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영국 해군의 이런 내실도 보지 못하고 [[Ctrl CV|단지 외면적인 부분만을 고대로 모방해온 것이]] 근대 일본 해군이므로, 대부분 프랑스군 및 [[독일군]](정확히는 [[프로이센군]])의 영향을 받은 상태에서 프랑스군의 교리를 오독한 일본 육군과는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영국처럼 [[해병대|육군을 포탄처럼 발사하는 개념]]이 생겨나는 건 [[수륙기동단|먼 미래의 일]]이 되어버렸다. 이는 영국의 전쟁사와 일본의 전쟁사 또한 그 양상이 판이한 것 역시 있다. 영국도 [[대영제국]]의 수립 이전까지는 서로 남남[* 왜 서로 남남이냐 하면 종족과 언어가 달라서이다. 브리튼 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잉글랜드는 [[게르만]] 분파인 [[앵글로색슨족|색슨(작센) 계열]]이지만, 나머지인 스코틀랜드, 웨일스는 [[켈트]]계에, 심지어 아일랜드는 이베리아계도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언어도 [[게일어]]를 쓴다. 지금 유럽의 뜨거운 감자인 [[브렉시트]] 문제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각각 다른 목소리를 내며, 심지어 스코틀랜드는 독립 투표를 추진하겠다고 선언까지 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인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웨일스]], [[아일랜드]]가 싸워대기는 했으나 그것도 중세 시절 얘기고, 이후에는 [[프랑스]], [[스페인]]과 같은 대륙 세력을 상대해야 했던 탓에 육군과 해군의 긴밀한 협조를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실질적으로 적들과 무기를 맞대야 하는 육군과 이들을 호위하면서 전장으로 실어다 줄 해군이 서로 따로 놀게 되어 전쟁 자체를 수행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반면 일본은 주로 일본 열도 내부에서 벌어지는 [[내전]]이 주된 전쟁이었으며[* 실제로 일본 역사에서 천황이 둘이던 남북조시대와 번끼리 싸우던 전국시대만 합쳐도 자그마치 수백 년-천 년이 된다.], 해군과 육군이 협력하여 싸움을 전개하는 것은 [[센고쿠 시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을 제외하고[* 사실 이 때도 육해군의 대립만 아니었지(이 시절 일본에서 수군에 능한 자는 [[도쿠이 미치유키|구루시마]] 등 일부 지역 다이묘 정도였다.) [[고니시 유키나가|고니시]]와 [[가토 기요마사|가토]], 무단파와 문치파의 대립 등이 있었다. 그리고 임진왜란 자체도 현대 일본에서까지 [[흑역사]]로 취급될 만큼 명분이 없는 전쟁이었던 탓에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일본군의 분열만 더욱 조장했다고 볼 수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세키가하라 전투]]가 일어난 게 대표적이다.]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랬기에 일본의 군대는 안 그래도 [[지역감정]]으로 으르렁대는데, 역사적으로도 서로 협력해서 싸워야 할 필요성을 느낀 적이 별로 없기 때문에 영국과 달리 분열된 것이다. 영국군과 일본군의 차이는 [[군대]]를 하나로 묶어줄 사령부의 특성의 차이에서도 볼 수 있다. 영국은 [[튜더 왕조]]의 [[엘리자베스 1세]]가 사망하고 [[스코틀랜드]] [[스튜어트 왕조]]의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에서 [[제임스 1세]]로 즉위했기에 [[동군연합]] 체제로 국가원수가 하나로 통일되어 있었다. [[아일랜드]]와 [[웨일즈]]의 경우에는 더 이전부터 [[잉글랜드]]의 지배하에 놓인 상태였다. 즉, [[스코틀랜드]]나, [[잉글랜드]]나, [[웨일즈]]나, 후에 편입되는 [[북아일랜드]]나 모두 똑같이 [[스튜어트 왕조]]로 시작되는 동일한 왕조를 모시고 있었다는 것이다. [[스튜어트 왕조]]는 [[앤 여왕]]의 사망 이후 [[하노버 왕국]]의 [[하노버 왕조]]로 교체되었고,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이후 [[하노버 왕국]]은 비록 [[동군연합]]은 해체됐을지언정 [[하노버 왕조]]만큼은 수백 년 동안 이어져왔으며, 현대에는 [[윈저 왕조]]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 혈통적으로는 여전히 [[하노버 왕조]]에 속한다. 또한 영국 [[명예혁명]] 이전까지 영국 왕가는 손수 국가를 다스렸고, 이후에도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특유의 사상을 바탕으로 간접적으로나마 정치에 관여해왔다. 당장 [[빅토리아 여왕]]만 하더라도 [[의회]] 및 [[총리]]와 정치적인 다툼을 벌여왔으며, 완전히 상징으로만 남게 된 것은 [[엘리자베스 2세]] 이후부터다. 단지 워낙 오랫동안 즉위해서 부각이 안 될 뿐이지.[* 그러나 엘리자베스 2세 역시 최소한의 정치적 권한이 남아 있는 것은 딱 하나 있는데, 바로 최종 결재권이다. 의회에 의해서 정치적 안건이 정해져도 최종적으로 총리는 여왕의 결재를 꼭 받아야 정식으로 수립된다는 것. 물론 엘리자베스 2세 본인이 크게 정치적으로 간섭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보니 수십년 사이 거의 사문화되어 웬만해서는 바로바로 통과된다. 뿐만 아니라 정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식으로 간접적으로나마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여왕의 말인만큼 의회나 총리도 절대 무시할 수 없기 때문. 당장 군대부터 공식 명칭이 국군이 아니라 왕립 군대이며, 충성의 대상은 단연 여왕이다. 물론 지휘 같은 건 총리와 문민정부를 따르나 엄연히 '공식적'으로 왕의 군대인 것. 게다가 완전히 아무런 실권도 행사하지 않는 것은 아니고 어떤 사안들에 대해서는 여왕 본인이 자신의 의향을 전달하기는 한다. 특히 왕가와 관련된 일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왕가와 관련된 일이 정치적인 일이 되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 게다가 영국은 정치를 투트랙으로 하는 나라다. 총리 내각이 나서기 그런 일에 왕가가 나서서 자리를 주선하거나 하는 식. 미국이 총리와의 정상회담을 거부하면 여왕이 국빈 초대를 해서 일단 방문은 하게 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다르다. [[헤이안 시대]] 때부터 [[후지와라]]의 섭관정치로 꼭두각시였고, [[헤이케모노가타리]]와 [[가마쿠라 막부]] 시대를 시작으로 천황은 정치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남북조시대(일본)|남북조 시대]], [[무로마치 막부]] 시대, [[센고쿠 시대]], [[에도 막부]] 시대 등 끊임없이 전란만이 이어져왔으며, 천황은 이 와중에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특히 남북조 시대의 북조 천황이 심각한데, 남조 천황은 정통성을 입증할 수라도 있었지(당장 천황이 통치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미쿠사노카무다카라|삼종신기]]부터 남조에 있었다.), 북조 천황은 어거지로 세워진 천황이었다. 거기다 또 하필이면 북조가 승리한 덕에(사실상 무가의 힘으로 승리한 것) 천황의 권위는 더욱더 나락으로 떨어졌다.] 16세기 중반의 일이긴 하지만 궁녀들이 매춘을 하고 천황도 스스로 서예작품을 팔아야 할 정도로 곤궁한 생활을 했으며, 동네 애들한테 돌팔매질까지 당한 [[고나라 덴노]] 같은 경우도 있었다. 이런 판국이니 [[메이지 유신]] 이후에 급작스럽게 쥐어진 권위로는 군을 제대로 묶을 수가 없었다. [[에도 막부]] 시대만 하더라도 일본은 각 번끼리 서로 모시는 [[다이묘]]들도 다 달랐고,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구심점이었던 에도 막부는 [[메이지 유신]]을 계기로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즉, 분열되어 있던 전근대 봉건 군대를 표면적으로는 근대 일본군으로 통일시키기는 했는데, 일원적 지휘체계를 통합시켜야 할 총사령부가 붕 떠버린 것이다. 이랬기에 [[영국]]과 달리 [[일본]]은 비록 형식적으로는 모두 '[[천황]]에게 충성하는 군대'라고 주장은 했으나, 실질적으로는 기존의 방식대로 평소 충성해오던 '번국'이라는 개념을 대체할 수 있는 육군과 해군이라는 자신의 소속과 파벌 쪽에 더 충성할 수밖에 없었다. 즉, 직접적으로 국가를 통치해오고 [[명예혁명]] 이후에도 간접적으로 정치에 개입을 함으로써 지속적으로 권위를 보여준 영국 왕가와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갑툭튀|어느 날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더니]] '나에게 충성하라.'고 주장하는 일본의 천황 사이에는 군 통솔력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러한 이유로 육군과 해군이 서로 자신만이 군의 주체라고 여기고 상대를 보조 수단으로 여기는데 제대로 협력할 리가 없었다. 특히 국민 여론의 구심점이 되는가 안 되는가라는 측면에서도 차이가 나는데, 일본의 천황은 영국이나 다른 왕조국가들의 왕과 달리 국민들의 구심점 역할도 제대로 못했다. 오히려 [[지도자 원리|국민들과 나머지 세계여론 상대론 만세일계의 천황가를 신봉하는 일치단결된 국가의 이미지를 강압적으로 전파하는 전체주의의 길로 빠지는 와중 실제 주요 국가 조직 운영은 저리 시대를 역행하는 듯한 봉건적 파벌주의가 실체]]였으니 바로 그 '''천황 독대권'''이란 특권 자체의 해당 부서는 관동군, 연합함대, 군령부처럼 부서이기주의, 파벌주의가 암적으로 팽배한 봉건왕국이 되어버리는 인증서 비슷한 것이 되어버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